[Open_Artist] 섬세하고 고요한 실내풍경 ‘빌헬름 함메르쇼이’
오픈에디션에서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인정 받았지만, 그 작품과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그 네 번째 작가는 고요하고 섬세한 실내풍경을 그린 덴마크의 대표적 상징주의 작가 빌헬름 함메르쇼이 Vilhelm Hammershoi (1864. 5. 15 ~ 1927. 2. 13)이다. 그는 덴마크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지지만 그의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79년부터 1884년까지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 초기에 미국출신 화가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의 영향을 받았다.
1891년 스물일곱살에 화가였던 피터 일스테드 Peter Ilsted의 동생 이다 일스테드 Ida Ilsted 와 결혼 후, 1898년부터 1909년까지 코펜하겐에 위치한 Strangade 30번지 아파트에서 실내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십여년간 많은 그림을 그렸다. 집 밖보다 안에서 편안한 고요를 즐기는 사람이었던 그는 아파트 공간 자체로부터 영감을 받고, 밤낮으로 같은 공간을 바라보며 다양한 시간대의 실내 풍경을 그려냈다.
특히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인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인상주의의 열풍이 불어 야외 풍경화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함메르쇼이의 실내 풍경은 상당히 독특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진부한 일상생활 같은 그림이라며 자국에서 조차 인정받지 못했으며, 십여 년간 무명의 세월을 보내다 1910년대 유럽 각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림의 정밀함과 상징주의는 유명한 독일 시인 릴케를 비롯한 국제 관람객들에게 호감을 샀으며, 파리 세계박람회와 뮌헨, 베를린, 런던, 로마 등 유럽 각지에서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섬세한 화풍으로 북유럽의 감성을 담은 함메르쇼이의 작품들은 1916년 52세의 나이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섬세하고 고요한 실내풍경
함메르쇼이가 활동하던 1890년대 유럽에서는 인상주의 풍경화가 유행이었지만, 덴마크에서는 해가 짧은 북유럽의 자연환경 때문인지 실내장면을 묘사하는 장르가 유행했다. 1989년 코펜하겐에 네델란드풍 작은 아파트를 얻어 그곳에서 고요한 실내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예민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그에게 있어서 집이란 공간은 ‘무한한 영감’을 주는 곳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북유럽의 겨울, 스며드는 따스한 햇빛 속에 군더더기 없는 회색톤의 벽, 정교하게 표현된 하얀 격자무늬 창틀이 너무나 아름답다. 여인의 앞모습이 나와있는 몇 안되는 그림들 중 하나로, 역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공간 속에 머무르고 있다. 햇볕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여인은 바느질을 하고 있는지 뭔가를 쥔 채 모든 것이 일시정지된 듯한 그림은 네델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실내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베르메르보다 조금 차가운 고요함을 머금은 그의 공간에서 휘슬러, 호퍼 작품에서의 고독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공간이야말로
나에게 완벽한 아름다움이죠.
아무도,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겨울이 길고 긴 북유럽 사람들에게 햇빛은 귀한 것이었고, 긴긴 겨울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함메르쇼이 또한 일생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보냈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비어있는 실내에서 고요한 정적을 온몸으로 느끼며, 조형적 요소를 끊임없이 찾아내었다. 작업하며 사색하며 늘 머무는 공간은 공간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이었다.
삶과 예술의 중심, 아내
모든 창문과 문이 활짝 열려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실내, 회색 공기 안에 조용히 머무는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다.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여인은 조금 어두운 곳에 머물며, 등을 보인채 가만히 서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고요와 정적이 감도는 순간, 차분한 뒷모습이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실내풍경 안에 아내 이다를 등장시켰다. 아내는 그의 삶과 예술의 중심이었다. 가장 익숙한 인물이기도 한 아내의 모습은 주로 일상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적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고상하게 그려낸 그림 속 아내의 뒷모습에서 그녀의 차분하고 절제된 내면이 느껴진다. 뒷모습은 자신이 볼 수 없고 타인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때로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의 작품속에서 인물은 단순히 모티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검은색 드레스의 또 하나의 어둠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아파트의 실내공간과 그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여인을 반복적으로 담은 그의 작품은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절제되고 정적인 미학으로 풀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오묘한 색채와 섬세한 붓터치
그의 그림은 회색과 브라운 톤 위주의 아주 제한된 색으로 채워져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섬세한 색단계를 보여준다. 붓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섬세한 터치로 표현된 묘한 색채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공허함, 신비로움과 긴장감 등 미묘한 감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노을이 지려는 시간 대의 실내를 그린듯 울긋불긋한 빛이 쏟아지는 실내의 모습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모든 벽과 바닥, 가구들은 빛을 받아 오묘한 색감으로, 섬세한 터치를 거치며 긴장과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의 표면은 마치 실크스크린처럼 느껴질만큼 얇지만 전혀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미묘한 붓터치로 이루어진 화면의 질감에서 투박하거나 과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적인 기법으로 자신이 그리려는 부분만 그려낸 미니멀리스트이자 상징주의 작가, 함메르쇼이의 작품은 길고 느린 호흡으로 다가온다.
아침에 문을 나서면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온듯 코끝이 시리다. 진부한 일상의 한 켠 따뜻한 공간, 차 한 잔과 함께 고요하고 차가운 계절을 닮은 함메르쇼이의 그림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참조 :
스칸디나비아 예술사, 이담북스, 2014
501 위대한 화가, 마로니에 북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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