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여백의 예술 ‘이우환’
오늘날 현대 미술사에서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우환은 미술시장에서 가장 작품가격이 비싼 작가 중 한 명이다. 정작 그는 가격으로 평가되는 것에 관심 없다고 하지만, 작품이 해마다 고가를 경신하고, 위작 논란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유명세를 실감하게 된다.
일본과 유럽에서는 설치미술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작가 이우환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 미대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철학을 전공하며, 동양의 전위미술 운동인 모노하(物派)를 이끌며,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 동향을 주도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아시아 현대작가로는 처음으로 파리 국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구겐하임, 베르사유궁전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수십년간 유럽과 일본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와 일본 독일의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상시로 엿볼 수 있는 곳으로는 일본 나오시마 섬에 만들어진 ‘이우환 미술관’과 부산 시립미술관 별관에 자리 잡은 ‘이우환 공간’이 있다.
/ 모노하(物派) 운동 /
관계항-지각과 현상(1969) / 출처: art.busan.go.kr
‘모노’는 일본어로 물체, 물건을 뜻하는 단어로, 모노하(物派) 운동은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종이, 돌, 나무 등의 소재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현대미술운동이다. 서양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의 동양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대신, 실제 사물을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후에 가서는 사물들이 위치한 시공간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였다.
1970년대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로 시작하여 80년대 <바람>, 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큰 캔버스에 한 번의 붓질을 담은 <조응>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나가며, 존재와 사물, 공간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표현했다. 1970년대 중반 평면회화에 집중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온 작품, 점과 선으로 대표되는 시리즈를 통해 자기만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마련하였다.
/ 점, 선, 여백 /
“무지의 캔버스에 하나의 점을 찍는다. 그것이 시작이다. 그리는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을 관계 짓게 하는 짓이다.
터치와 논 터치의 겨룸과 상호침투의 간섭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여백현상이야말로 회화를 열린 것이 되게 해준다.”
– 이우환의 저서 <여백의 예술> 中 –
여백이 가득한 화면 위에 점들이 진해졌다가 흐려졌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간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묘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안료를 찍어 캔버스에 묻혀나가는 방식으로, 붓끝의 물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점이나 선을 그려낸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는 반복이 계속되면서 차이가 만들어지는 행위의 흔적과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붓질을 반복하면서 작가와 관객은 ‘무한’을 경험하게 된다.
비가 내리듯 파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이 작품은 청색 안료를 이용해 붓끝에 물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위에서 아래로, ‘한 방향’으로 내려그은 것이다. 캔버스의 아랫쪽까지 내려오는 붓질은 위로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곱게 빗어내린 듯한 선은 복잡한 머릿속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캔버스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점 흐려지는 선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여백은 화면에 여유를 주고 있다. 작가는 이 ‘여백’을 통해 ‘생성과 소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여백을 보고 있다보면 명상을 하듯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한다. 여백은 단지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이 서로 강력한 에너지를 반향하면서 서로에게 응답하는 곳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대담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파란 붓질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70년대의 점, 선 시리즈에 이어 80년대에 그려진 바람시리즈 중 하나다. <바람으로부터>라는 작품명처럼 그의 작품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걸까. <선으로부터>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차분한 붓질 대신 가로, 세로의 대담한 붓질과 시원한 여백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호흡과 리듬감 또한 엿볼 수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점에서 시작되어 점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점은 새로운 점을 부르고, 그리고 선으로 이어간다.
모든 것은 점과 선의 집합과 산란의 광경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점이며 산다는 것은 선이므로, 나 또한 점이며 선이다.
삼라만상이 나의 재생산이 아닌 것처럼
내가 표현하는 점 또한 늘 새로운 생명체가 되리라”
– 이우환의 저서 <여백의 예술> 中 –
여백과 절제미가 드러나는 이우환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한 형태이지만, 명확한 이론적 토대와 현대철학과 그 흐름을 같이 하며 상당한 고민을 거친 작품들이다. 그는 의식 넘어에 있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문제 제기를 하며 작품을 통해 점과 선의 개념, 선의 의미, 관계, 무한한 시공간 개념을 담고자 했다. 언뜻 보기에 선 긋기, 점 찍기 연습처럼 보여질 수 있는 이우환의 작품은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를 알고나면 감상이 더 풍부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참고도서 : ‘여백의 예술’, 이우환, 현대문학,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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