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 그들의 교육과 예술
독일어로 바우 ‘Bau’는 건축을 뜻하고 하우스 ‘Haus‘는 집을 뜻한다. ‘건축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설립되어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약 14년간 이어 온 예술 교육기관으로,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교육 이념과 커리큘럼을 갖고 출발한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다.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바우하우스는 전시, 다큐, 인쇄물 등 많은 매체들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배포된 책자에는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약 150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방식의 수업을 추구하였던 바우하우스에서는 교수대신 장인의 의미로 ‘마이스터meiste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오픈에디션은 바우하우스 리더이자 각 분야 마이스터들의 교육 이념과 예술 작품을 통해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파울 클레’
전공과 예술적인 재능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인성이나 교육방법이 다른 두 작가 파울 클레 Paul Klee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는 비슷한 시기에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임명되어 선과 색의 구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을 가르쳤다.
현대 추상 회화의 시조라 불리우는 파울 클레 Paul Klee는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전문가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을 뽐내며, 21세 때 회화를 전공하면서도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모차르트의 음악에 심취한 그는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조금 어두우면서 환상적인 판화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1914년 튀니지 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뜨며 작품의 큰 변화가 시작된다. 1921년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을 제의 받게 된 그는 요청에 대해 흔쾌히 수락하지는 않았다. 교수직을 수락하기 전에 그는 미리 바이마르로 가서 현재 살고 있는 뮌헨의 물가와 비교해 보는 등 현실적인 고민을 거쳐 바우하우스에 오게 된다. 그리하여 파울 클레는 1931년까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마이스터로서 글라스화를 담당하여 가르쳤으며, 후에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교수가 되어 1933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에 의한 예술 탄압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1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몰수 당하게 되자, 결국 고향인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가 수년을 지내다 1940년 세상을 떠났다.
클레의 작품은 환상적이고 기묘하면서도 어린 아이가 그리고 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의 작품들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몰락의 위기에 처해있던 유럽의 문화와 전통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독특한 추상화로서 시대의 지지를 받았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 ‘바실리 칸딘스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여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전공하고 대학교수까지 되었던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는 늦은 나이인 30세 때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890년대 독일 뮌헨에 정착하여 인체뎃생, 해부학 등을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미술 교수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과 맞지 않았던 그는 결국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와 1922년에서 33년까지 바우하우스에서 벽화 공방의 마이스터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후 바우하우스의 위상이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폐쇄되는 날까지 그는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가장 직접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에 방해되는 대상은 지우고, 색과 선이라는 가장 순수한 회화의 요소만으로 작품을 그렸다.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으로써 보다 강렬한 색과 다양한 형태들이 자유롭게 화면에서 살아 숨쉬게 되었다.
1926년에는 바우하우스의 강의 내용을 토대로 <점, 선, 면>이 출판 되기도 했다. 회화의 평면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 요소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 한 것인데,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합리주의적 방향으로 나가려던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그의 그림과 저서들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학생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주려 했고, 끊임없는 비판과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교수이자 작가였다.
실험적 무대예술 ‘오스카 슐레머’
1888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극작가의 아들로 태어난 오스카 슐레머 Oskar Schlemmer는 어려서부터 무대와 친숙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회화와 조각, 무용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3년에는 바우하우스의 조각 담당 마이스터로 부임하게 된다. 바우하우스의 여느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나치의 박해를 받은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던 슐레머의 작품들은 기하학적인 구성과 함께 실험적이면서도 기괴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린넨천 위에 수채화와 잉크로 그린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질듯한 계단의 구조는 기계적이면서도 보는 이의 시선을 묘하게 이끈다. 계단을 오르는 학생들은 높은 이상향의 바우하우스 정신을 따라 어서 이 계단에 오르라고 권유하는 듯 하다.
데 스틸의 리더 ‘데오 반 두스부르흐’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시인이며 건축가인 데오 반 두스부르흐 Theo van Doesburg는 1910년대 초반에는 주로 시를 쓰거나 예술 비평가로서 활동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군복무 중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고 추상미술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후 몬드리안의 작품을 접하며 회화의 이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1917년 몬드리안의 회화로부터 발전시킨 새로운 조형 운동을 위한 단체 ‘데 스틸’을 결성하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창간한다. 데 스틸은 양식을 의미하는 네델란드 말로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추구해 나갔다.
1917년 ’데 스틸’ 잡지 표지 *출처 : dutchculturekorea.com
두스부르흐는 몬드리안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추상화 뿐 아니라 건축 및 실내 장식, 스테인드 글라스, 가구, 생활용품을 디자인하며 ‘데 스틸’의 미적 이론과 그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담아내었다. 정신적인 것에만 집중했던 몬드리안과 달리 그는 예술을 이용해 현실, 삶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랬고, 이러한 차이는 결국 후기에 가서 몬드리안과 갈라지는 계기가 된다. 수직과 수평의 선과 원색만을 사용하는 몬드리안의 양식이 가진 엄격한 규칙에 대하여 보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에너지가 넘치기를 원했던 그는 기하학적 추상과 데 스틸에 대한 수많은 글을 쓰고 출판하였으며, 데 스틸 예술가들과 관련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를 열기도 했다. 데 스틸의 리더이자, 홍보대사 역할을 맡았던 그는 리듬감 있는 새로운 예술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향상 되기를 바랬다.
1921년 독일에 가게 된 그는 베를린과 바이마르를 방문하게 되고, 결국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데 스틸 교과 과정을 운영하게 된다.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던 두스부르흐는 파리에서 건축 디자인 전시를 여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31년 스위스에서 50년 남짓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예술 이론과 디자인적 유산은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현대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작가 ‘요스트 슈미트’
1923년 ‘예술과 기술’이라는 타이틀로 개최된 바우하우스의 전시 포스터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전공한 학생이었던 요스트 슈미트 Joost Schmidt는 회화, 건축, 조각, 타이포그래피, 판화 등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1928년 바우하우스의 책임자가 된 그는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바우하우스의 학생과 교수 중 가장 다채로운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바우하우스의 중심 인물로서 특히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를 디자인 도구로 사용하며 정보 전달을 강조함과 동시에 장식적인 요소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예술과 문자의 융합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기술과 매체를 이용한 총체적 예술 ‘라즐로 모홀리나기’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울만큼 시각예술의 모든 장르를 넘나든 예술가 라즐로 모홀리나기 Lazlo Moholy – Nagy는 1895년 헝가리 태생으로 1914년 법학을 공부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에 가게 된다. 군복무 중 시를 쓰고 드로잉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제대 후 헝가리 문학지에 시를 기고하거나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는 등 법학도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19년에는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은 그는 1920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포토그램 Photogram과 포토몽타주 Photomontage 등 사진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탐구하였다. 그는 다다, 러시아 구성주의, 절대주의 ,포토그램, 영상, 회화, 조각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다방면으로 다루었으며, 새로운 시각을 가진 아주 열정적이고 혁신적인 예술가이자 이론가였다.
1921년에는 베를린에서 열린 구성주의 전시회에서 그로피우스를 만나 바우하우스 교수직을 제의 받은 그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 예비반과 금속 아뜰리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이 아닌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통해 학생들이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시각과 생각을 갖기를 바랐다.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그래픽, 공예, 건축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산업 디자인의 양식을 창조했고 그 기준을 마련 했으며, 현대의 건축과 타이포그래피 등 모든 것들을 바꾸어 놓으며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생활 속 디자인의 시작점이 되었다. 대량생산과 기능성이 강조된 빠르고 편리한 설계 방법은 현대 디자인의 흐름을 급속하게 바꾸어 주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스럽고 폐허가 된 유럽 전역 사람들의 일상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재료나 색채 이론, 그리고 디자인 등 기초과정과 커리큘럼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발전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흐름에 따라 체계화된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과 프로그램은 오늘날의 교육과 현대 디자인의 시작을 알리는 원천이자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Thanks for the Bauhaus.
참조 :
바우하우스, 시공사
테마로 보는 미술 – 네이버 지식백과
네덜란드대사관 공식 블로그
dutchculture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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